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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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양광철 간사
홈페이지   http://www.donghak.ne.kr
첨부된 파일   한승헌_변호사.jpg (51.6 KB), 다운로드: 216
제목   보람 컸던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10년 집권´

길을 찾아서,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69´

나는 1993년 7월, 전주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사단법인체로 출범할 때, 그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북지역에서 처음 일어나서 전국화한 농민전쟁이었다. 봉건왕조의 부패·학정과 외세 침략에 맞섰던 그 정신을 이어받아 뜻있는 여러 사업을 하고자 기념사업회의 깃발을 올린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동학난’이란 인식이 남아 있어서 사업이나 행사를 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동학농민혁명 백주년(1994년) 기념행사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전북지사에게 기념식에 나와 축사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 혁명이란 것이 요즘 말로 하자면, 도지사인 제가 반란군한테 쫓겨서 도망을 간 사건인데, 어떻게 제 입으로 축사를 할 수가 있습니까.” 내 말은 이러했다. “지금의 도지사가 1894년 당시 농민군에게 쫓겨 가던 그런 관찰사와 똑같다면 기념식에 나오지 마십시오.”

기념식이 열리던 날, 도지사가 식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축사를 했다. 함께 온 경찰국장은 만세를 선창했다. 이렇게 해서 ‘합법공간’을 넓히고 모금사업도 조금씩 풀려나갔다. 하지만 돈타령은 시민운동단체의 ‘애창곡’이나 다름없었다. 생각 끝에 과천에 있는 한국마사회를 찾아 갔다. 얼마간의 지원금을 받고 나서 점심 대접도 받았다. 나는 감사의 인사말을 했다. “지금까지 많은 대접을 받아왔지만, 말(馬)이 번 돈으로 대접을 받기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동학농민혁명 백산 봉기·전주 입성·집강소 설치 등 뜻있는 날에는 연례적으로 기념행사를 열었고, 그밖에 각종 문화예술사업, 출판사업, 현창(顯彰)사업도 펼쳤다.

그중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1996년 5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봉환해 온 일이었다. <한겨레>에서 관계 기사를 읽고 홋카이도대학(호쿠다이=북대) 쪽에 팩스·전화 등으로 교섭을 한 뒤, 현지 방문까지 해서 협의를 했다. 그 결과, 그 대학의 한 표본고(標本庫)에 90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동학농민군 유골을 우리에게 넘겨주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그 유골 표면에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首級)’이라고 쓰여 있는데다 부전(附箋)에 사토오 마사지로라는 일본인이 1906년 전남 진도에서 ‘채집’했다고 적혀 있어서 그 유골의 주인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나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천도교 및 동학혁명유족회와 공동으로 봉환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상임대표로서 홋카이도대학측과 교섭을 계속해 나갔다. 그쪽 조사위원장은 근현대사학자로 이름난 이노우에 가즈오 교수였는데, 진상조사 결과를 소상히 알려주는 등 우리 쪽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신문·방송 취재진과 함께 삿뽀로시에 있는 북대로 간 우리측 봉환단은 그해 5월29일 오전, 북대측과 공동으로 봉환식을 거행하였다. 이 행사에는 북대 총장을 비롯한 많은 교수들, 시민운동가들 그리고 우리 영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 나는 고유문(告由文)을 통하여 “일본의 국립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한국인의 유골을 수집하고 방치한 데 대하여 일본정부는 마땅히 사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북대 문학부장 하이야 게이죠 교수는 지난 날 일본의 대학에서 식민학·인종론 등을 연구한 일과 유골의 수집 방치에 대하여 사과하는 말을 했다. 또한 그는 앞서 말한 이노우에 교수와 함께 우리 봉환단을 따라 한국에 와서(5월30일) 전주에서 열린 진혼제 자리에서 사과문을 낭독했다. 일본인의 손에 ‘채집’되어 가서 침략자의 땅에서 90년 동안이나 버려져 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모셔온 일은 당시 국내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어진 터였다.

99년 2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음악극 <천명>(天命) (원작 김용옥·작곡 박범훈·연출 손진책·안무 국수호. 국립극장 산하 5개 공연단체 공동 출연)의 광주·전주 공연을 성사시킨 일, 2001년 5월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를 다룬 한·중·일 국제학술회의(전주, 3박4일)를 열어 많은 성과를 거둔 일 등이 기억에 남는다. 그 학술회의에 참가한 한 일본 학자가 자기 나라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성명의 기초에 앞장서고, 낭독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던 광경이 떠오르기도 한다.

서울-전주를 왕래하면서 이사장 노릇을 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지만, 보람은 컸다. 그러나 '10년 장기집권'은 내 뜻이 아니었다. 뒤늦게 후임자를 정하고 2004년 초 이임하는 자리에서 나는 말했다. ˝나는 너무 오래 했다. 과거 1인 장기 집권을 그렇게 비난하던 내 자신이 '10년 집권'을 하다니, 그 이유가 뭐든 간에 잘못된 일이었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 2009. 4. 13.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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